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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6> 검은 옷:장애인인식개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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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6> 검은 옷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기사입력 2023/02/25 [18:01]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6> 검은 옷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입력 : 2023/02/25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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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 젖가슴 1     ©장애인인식개선신문

<6> 검은 옷

 

 

 

무신년 임금이 급사하여, 세자가 왕위에 올랐다.

선왕이 쉰을 넘어 얻은 대군의 나이가 세 살 되던 해였다. 선왕은 대군이 무리임을 알고, 의지와는 달랐으나 세자에게 선위하겠다는 교서를 영의정에게 남겼다. 다만 서인과 소북 무리에게 대군의 후사 또한 맡겼으니 새 임금은 온전한 하나로 서지 못했다.

하여 그가 임금이 되어 처음 피를 본 일이, 선위교서를 감춘 영의정 유영경의 주살이었다. 유영경의 소북을 베어낸 대북은 임금에게 권위를 부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도 마찬가지로 권위를 얻었다.

서인과 남인은 몸을 낮추었다. 임금도 손을 낮추어 그들을 등용하였다. 남인인 한음이 영의정에 올랐다. 임금은 재상의 자리를 대북에게 주지 않았다. 조력자에 대한 견제였다. 임금과 대북은 서로를 이용하고 견제했다. 임금이 각을 세우면 대북이 등을 낮추었고, 다시 임금이 눈을 낮추면 대북은 목을 높이었다.

함께하나 어긋나는 물림이 외려 바퀴와 같아 동력을 발하고 개혁을 이루어갔다.

전하,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다 바퀴가 한 길목에서 큰 걸림돌을 만났으니, 그곳은 교하였다.

명이 쇠하고, 여진 누르하치의 흥기가 하늘을 찌르오. 경들은 이를 모르는가.

임금은 천도를 수로 꺼내었다.

그는 사직을 교하로 옮기고자 하였다. 세가 커진 여진이 후일 일으킬 전란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교하는 나라의 군세를 운용하기에 한성보다 더 적합한 곳이었다.

천도는 아니 되옵니다, 전하.

먼저 내치를 더 강건히 하셔야 하옵니다.

사직을 옮김에 시기가 맞지 않습니다. 민생을 더 바삐 여겨주소서.

신들이 반대하였다. 특히 서인의 목소리가 높았다. 말을 유연히 잘 쓰는 예조판서가 반대를 주도하였다. 남인도 뜻을 보태었다. 대북은 침묵하고 임금을 돕지 않았다.

임금은 맞섰다. 미는 자와 막는 자의 말은 저마다 합당한 이유가 있었다. 모두의 말이, 말이 되었다. 격한 쟁이었다.

부원군께선 어찌 말씀이 없으십니까.

쟁이 한창 깊어지고 있을 때, 예조판서 최기해가 내게 말했다.

올릴 제언은 있사오나, 일단 더 듣겠습니다.

더 들으신다니요,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최기해가 물었다. 서인의 자리에 서 있는 내가 막는 소리를 내지 않고 무얼 하고 있냐는 역정과도 같이 들렸다.

임금의 목소리가 자못 높아져 있는 상태였다. 나는 임금에게 호흡을 살필 시간을 주기 위해 한 차례 익살을 부렸다.

예판은 왜란 때 한성의 위쪽에만 쭉 계셨으니, 이 사람보다 교하의 사정에 더 밝으리라 사료됩니다. 하여 일단 말씀을 듣고만 있습니다.

뜨거워진 편전이 내 농에 사윌 필요가 있었다. 최기해는 얼굴을 붉히며 머쓱해했다. 열 뒤쪽의 신들은 실소가 나올 듯한 표정을 지었다. 쟁이 잠시 사그라졌다.

오성의 말이 옳다. 너희가 무엇을 아는가.

그때 임금이 말을 낮추었다.

왜란 때 도망가기 바빴던 너희가 무엇을 알겠는가.

임금은 호흡을 살피지 않고 외려 말에 더욱 힘을 주기 시작했다. 나의 농으로 식은 편전이 임금의 소리로 다시 달구어졌다.

지난 왜란 때 명군의 군세는 천병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았다. 그들은 몫을 다하여 싸우지 않았다. 자리를 가리며 싸웠다. 명의 장수들은 전투를 쉬이 무르고, 밤이면 연회를 강요하며 조선을 핍박하였다. 그런 명이 쇠할 것을 나는 미리 짐작하였다. 여진의 기세가 날로 커져 가니 군세를 쉬이 살필 곳으로 가 대비하자는 것이다. 사지에 있던 내가 다시 묻는다. 너희는 아는가, 무엇을 아는가.

명군은 북경에 수급을 보내어 기세를 떨치고 천자를 기쁘게 해야 했다. 하여 조선 육군이 벤 수급의 대부분이 명군의 것으로 셈해졌다. 베어진 머리가 머나먼 북경까지 가기 위해선 염장이 돼야 했고, 그마저도 조선 백성의 소금으로 행해졌다. 주리고 주린 그들이 낟알을 대신하여 씹던 것이었다.

명은 왜보다 더 가혹하게 조선을 수탈하였다.

싸움에 맞는 자리를, 몫을 다할 수 있는 자리를 찾고자 하는 것이니 경들은 그 일을 돕는 데 지혜를 아낌이 없어야 할 터. 이 쟁은 잠시 쉬어 갈 테니 과인이 말을 꺼내기 전에 경들은 먼저 천도를 입에 올리지 마시오.

임금은 낮춘 말을 다시 높이고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섰다.

 

 

임금은 늦은 밤 서청 별채에서 한음과 나를 자주 찾았다.

전하, 왕실의 법도는 낮밤을 가리는 일이 없사온데…….

언제부턴가 임금은 붉은 곤룡포를 벗고, 검은 평복으로 환복하여 우리를 맞곤 했다.

내 검은 옷을 편해함을 경들도 알 것 아니오.

이 나라가 세자에게 다른 색을 주는 일은 없었다. 선왕은 저와 같은 붉은 것을 입은 세자가 보기 싫어 그에게 검은 것을 주었다. 사직의 예를 뒤엎고 바꾼 일이다. 임금은 과거, 선왕이 준 검은 것을 입고 정유년의 재란을 맞았다. 임진년의 분조가 깨지고 난이 다시 일어나자, 검은 옷을 입은 세자는 사지인 삼남으로가 군세를 살피고 민생을 돌보았다. 아비는 자식에게 검은 것을 주었고, 자식은 그것을 선뜻 받아들여 죽음의 땅으로 갔다. 그리고 살아 돌아왔다. 살아 돌아온 자에게 죽음은 여전한 두려움일 수 있으나, 사리에 맞지 않게도 또한 편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음을 고작 스물 남짓의 세자는 옷을 걸친 제 단신으로 깨달았다.

그 깨달음은 같은 해, 흰 충렬로 종군하였던 어느 무인과도 같았음이라.

두 사람과 나는 늘 반대요.

임금이 말하였다.

경들은 편전에서는 농을 서슴지 않으나, 사사로운 자리에선 천근추같이 무거워집니다. 심각한 얼굴들 좀 펴시오. 경들도 편전에서 나를 보면 이런 기분일까.

목소리가 가벼웠다. 오늘의 자리는 그저 야밤의 작은 흥취를 위한 것으로 보였다. 즉위 후 계속된 불안을 오늘은 잠시 물리고 싶은 듯했다.

전하, 교하로의 천도는 언젠가 마땅히 필요한 일이오나 지금은 아니옵니다. 국고의 재정이 핍하여 사정에 맞지 않습니다. 허니 천도는 후일의 일로 미루소서.

맞은편에 앉아 있던 한음이 쟁을 다시 들추었다. 임금은 별 기색 없이 술을 들었다.

천도 얘기는 그만합시다. 쉬어가기로 한 일을, 구태여.

전하의 성정을 아는 신이옵니다. 오랜 신하의 충정 어린 제언이니 새겨주소서.

 

 

야담을 마치고 돌아와 사랑에서 호롱을 밝혔다. 가까운 종인 탄이 나를 찾았다.

곤할 텐데 이만 쉬지 않고.

대감, 올릴 말씀이 있어…….

임금이 오늘처럼 별채에서 나를 찾을 때면 나는 걸음이 재고 몸이 날렵한 탄에게만 곁을 허락하여 열을 가벼이 하였다. 나와 한음이 임금과 야담을 나누는 동안, 별채와 한참 떨어진 나무 아래서 기다렸던 녀석은 근방에서 다른 무리를 보았노라고 일렀다.

그들도 임금을 찾았거나 임금이 그들을 찾은 것이다.

그들을 보고 몸을 숨겨 움직임을 살폈습니다. 대감과 한음 어른 두 분께서 말씀을 끝내고 나오시자 주변을 살피던 그들이 전하의 별채로 들어섰습니다. 밤이 깊어 모두의 얼굴은 살피지 못했지만…….

아는 얼굴이 있더냐.

나는 과거 신하였고 지금도 신하이나, 그는 이제 세자에서 임금이 되었다.

대사헌 이이첨 대감을 보았습니다.

탄의 입에서 듣고 싶지 않은 이름이 나왔다. 임금의 명으로 대사헌에 오른 그였다.

잘못 짚어 기우가 되길 한편으로 바랐으나 마음과 달리 나는 깊은 수심에 잠겼다. 임금의 시정이 유영경에서 끝나지 않을 것을, 바퀴의 방향이 교하로만 향하지 않을 것을 짐작하게 되었다. 나는 임금이 선왕에게서 보고 배운 것이 없지 않음을 일면에서나마 기쁘게, 허나 더없이 슬프게 생각하게 되었다.

탄을 물리고 어지러운 마음에 대청으로 난 창을 열었다. 밤하늘이 유난히 어두워 임금의 옷 색과 같았다. 여전히 유황 냄새를 풍기는 그 옷 색과 아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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