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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19-수필-최우수상]-이현이 - '풍구질'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기사입력 2023/02/15 [23:03]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19-수필-최우수상]-이현이 - '풍구질'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입력 : 2023/02/15 [2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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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19-수필-최우수상]-이현이 - '풍구질'     ©장애인인식개선신문

(장애인인식개선신문)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19-수필-최우수상]-이현이 - '풍구질'
 
풍구질 
 
이현이
 
어릴 적 풍구질은 종종 내 몫이었다. 형제들은 밖에서 노느라 늘 부족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집에 있을 때가 많아 길고 무료한 날을 보내야 했다. 
  
첫돌 지나고 걸음마를 뗄 무렵 나는 소아마비에 걸려 왼쪽 다리를 절었다. 기우뚱거리는 걸음과 가느다란 다리로 친구들을 따라다니기에는 힘에 부쳤다. 저녁밥 짓는 엄마를 도와 불 때는 일이 자연스럽게 내 차지가 된 이유이기도 하다.
  
부뚜막에는 가마솥과 중간 솥, 그리고 작은 솥이 삼 형제처럼 나란히 걸려 있었고 바지런하고 깔끔한 엄마는 정기적으로 기름칠을 해 무쇠솥을 반들반들 윤나게 닦았다. 흙으로 된 부엌 바닥은 지푸라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단단했다. 벽에 검은 그을음이 묻거나 흙이 떨어져 나가면 얼른 황토로 반죽을 해 깨끗하게 발라 놓았다. 
  
나이 어린 새댁이 살림 잘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동네 사람들이 몰래 와서 엿보고 가기도 했다. 엄마는 가난한 집 맏아들에 동생들까지 딸린 남자를 만나, 홀시아버지를 극진히 모셔 칭송을 받았다.
 
  
엄마가 물을 길어다가 가마솥을 가득 채우면 나는 풍구질을 해 불을 땠다.
왕겨를 한 움큼 집어넣고 풍구를 돌리면 바람이 나오면서 불이 붙었다. 타고나면 까맣게 되는데 얼른 몇 움큼 집어넣고 풍구질을 하면 꽃이 피듯 다시 빨갛게 피어올랐다. 다 타기 전에 왕겨를 집어넣고 오른손으로는 부지런히 풍구 손잡이를 돌려야 한다. 왼손과 오른손의 호흡이 잘 맞아야 불꽃을 유지할 수 있다. 
  
나는 아궁이를 들여다보는 게 좋았다. 끝없이 긴 아궁이 속이 궁금했다. 불이 타오르며 뜨거운 연기가 구들장으로 들어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해주는 게 신기하기만 했다.
  
까맣게 숨이 멎는 듯하다가 다시 타오르는 걸 보면서 일찌감치 생의 양면성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밤과 낮, 슬픔과 기쁨, 빛과 그림자가 동전의 양면처럼 하나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느 날 아버지가 앉은뱅이 의자를 만들어주셨다. 쪼그려 앉거나 바닥에 철퍼덕 앉아 있는 딸이 안쓰러웠나 보다. 넓적한 다리 두 개에 물결치는 무늬가 있는 상판이 덧대진 작은 의자는 내게 안성맞춤이었다.
  
아버지가 만든 나무 의자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아 불을 때는 시간이 내겐 놀이였다. 춤을 추기도 하고 혀를 날름거리기도 하는 불꽃은 가히 환상적이었다. 풍구를 돌릴 때의 윙윙 소리는 리듬감이 있어 어떤 의식을 치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황홀경에 빠져 있다 보면 어느새 하얀 김이 나오면서 물이 데워졌다는 신호를 보냈다.
  
기쁨과 슬픔을 바람이 데려왔다가 바람이 데려가는 것만 같았다. 그 바람은 내 손안에 있었다. 풍구질을 멈추거나 돌리면서 바람을 조종할 수 있다는 게 뭔지 모를 환희와 뿌듯함이 느껴졌다.
 
  
내가 불을 때는 동안 엄마의 고무신은 잰걸음으로 바삐 움직였다.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국 냄새가 시장기를 돌게 했고, 들기름을 발라 구운 김 냄새는 좁은 부엌을 벗어나 마당에 퍼져 나갔다. 
  
언니와 오빠가 손을 호호 불며 들어왔다. 엄마는 집안일 좀 거들지 않고 어디를 그렇게 쏘댕기냐며 꾸지람했다. 나는 어깨가 으쓱해지기도 했지만, 죄지은 거 없으면서도 공연히 형제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왁자한 가운데 우리 일곱 식구는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저녁을 먹었다. 그때는 별다른 반찬 없이도 밥이 달았다.
 
  
그 시절의 부엌이 사라져 흑백 사진처럼 희미해진 지도 오래전 일이 되었다. 아버지는 십수 년 전에 돌아가셨고, 제일 나중에 온 막냇동생은 뭐가 그리 바쁜지 하늘나라로 갔다. 
  
지금 엄마는 희미해진 추억 속을 왕래하신다. 불꽃이 일어났다 사그라졌다 하는 것처럼 기억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나 보다. 
  
젊고 바지런했던 여인은 지금 아궁이 속의 재처럼 연약하고 미지근한 온기로 남아있다. 엄마의 세월도 나의 세월도 지나가고 있다. 덧없다 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시간은 지나가고 주름살은 늘어가지만, 해마다 싹이 돋고 꽃이 피어나듯 또다시 만날 것이다.
 
  
풍구를 돌리며 아궁이를 응시하던 조그마한 아이는 가을의 계절을 지나가며 자신의 삶에 새로운 불꽃을 피우려 애쓰고 있다. 활활 거세게 타오르지는 않더라도 환하고 뭉근한 불꽃을 피우고 싶다. 
  
나뭇등걸처럼 세월의 흔적이 묻어 거칠고 뭉툭해졌지만, 왼손과 오른손의 호흡이 어릴 적과는 달리 그런대로 잘 맞는다. 슬픔은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내고 기쁨은 반가운 손님처럼 맞이하면서, 바람을 일으키며 삶의 풍구를 돌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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