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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3> 맞닿은 둘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기사입력 2023/02/24 [08:01]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3> 맞닿은 둘

장애인인식개선신문 | 입력 : 2023/02/24 [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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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32회 대한민국장애인문학상 문학전집-[2021-중편소설-최우수상]- 김효정 - '하얀모래'- 젖가슴 1     ©장애인인식개선신문

(장애인 인식개선 신문) 

정유년 다시 난이 일었다.

임금은 환도한 이후로 줄곧 조정에 눌러 앉았다. 그는 조정에 올라오는 상소를 택하거나 파하였고, 전교를 내려 누군가를 벌하며 또 누군가에겐 힘을 주었다. 임금은 제 언어로 정국을 이끌었다. 때론 그 언어는 울음이 되었고, 명의 천자를 찾는 애달픈 그리움이 되기도 하였다. 그해 임금은 잔병을 자주 앓았다.

과인이 또 천자께 천병을 청하러 북으로 가야 하는가 하여 시름이 깊도다…….

이런 가운데 후사를 잇지 못한 왕후가 몸져눕자 지천명을 바라보는 임금은 몹시 다급해했다. 폐세자의 명분으로는, 정궁의 몸에서 나올 대군의 울음이 필요하였다. 임금은 은밀히 중신들을 모아 간택 이야기를 잠시 입에 올렸으나 시기가 맞지 않음을 알고 이내 말을 물렀다. 전란을 맞았으나 임금은 제 언어와 제 일로 바빴다.

하여 이번에도 움직여 살피는 이는 세자가 되어야 했다.

과인은 정사를 살피고자 조정을 지켜야 하니 세자는 삼남으로 가 몫을 다하라.

임진년 때와는 달리 임금은 세자에게 노신을 주지 않고, 젊고 유능하며 무에 능한 이들을 붙여주었다. 이번에는 아주 전장의 앞자락으로 가라는 것이었고, 나아가 그곳에서 죽어도 좋다는 뜻이었다. 스스로 죽으면 폐세자를 추진할 일도 없었다. 세자는 이 모든 뜻을 알고 받아들여 다시 또 설운 길에 올랐다.

설움에게 붙여진 것들 중에 또 그와 같은 설움이 있었다.

나와 함께, 세자에게 이이첨이 붙여졌다. 이이첨은 병조좌랑으로 세자시강원의 사서직을 겸하고 있었다. 그는 앞서 백여 년 전 그 5대조가 사화(士禍)로 멸문에 가까운 화를 당한 집안의 사람이었다. 하여 소과에 능히 합격하고도 10년이 넘도록 집안 내력의 문제로 대과에서는 번번이 낙방되고 말았다. 그 이유로 가진 능력에 비해 오랜 세월 낮은 자리를 전전해야 했다.

그런 그가 임진년 왜가 광릉에 불을 질러 세조의 어진(御眞)이 탈 위험에 처하자 불길 속에 뛰어들어 그것을 지켜냈다는 공으로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얻게 되었다. 하여 그는 임금의 마음을 얻어 광릉 참봉을 지내고 이후 사서직에까지 오르니 세자와 맞닿아 아주 가까운 인연을 맺게 되었다.

이이첨은 권세를 탐하지 않았고 행실 또한 가볍지 않아 곧음이 선명한 자였다. 문장이 훌륭하였는데 무에도 능한 기질이 있어 풍채가 크고 가진 인상이 매서웠다. 세자의 사람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고 믿음이 가는 인물이었다. 그는 무리에 속하기를 꺼리며 세()라는 것을 애써 모르려 노력하였는데, 이는 앞날 제 집안이 당한 화가 그 이유인 듯싶었다.

다만 이이첨은 권(), 힘 그 자체를 신봉하는 듯한 기운을 희미하게 풍기곤 했다. 나의 향 포천과 가까운 광릉의 참봉이란 인연으로 앞날에 일찍이 대면할 때 그러했고, 내가 세자사(世子師)로 있는 시강원의 사서로서 세자에게 골라 올리는 책이 그러했다. 또한 그 앞에서 뜻을 강조하기 위해 거듭 읽어대는 문장의 내용이 그러했다.

 

……군주가 인()을 행함에 있어 앞서 이루어져야하는 것은 벌()이다. 벌이 있어야 비로소 인이 있다. 군주가 어짊을 쫓고자 모짊을 꺼려한다면, 만인이 그를 업신여겨 나라가 바로서지 못할 것이다. 허니 인과 벌이 본디 하나다…….

 

뿐만 아니다. 나와 한음과 같이 조정에서 홀로 서려는 그 성정을 보고, 또한 그리 생각하였다.

다만 우리 둘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는 조정에서 제 힘을 애써 감추지 않았으며 제 뜻을 전하는 데 말을 돌리거나 비트는 일이 없었다. 그가 꺼내는 말은 모두 진짜였고 그 말에 남다른 힘이 있었다. 큰 풍채에 커다란 턱을 가진 그가 어느 높은 메에 제 힘으로 홀로 서는 산군과도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하여 나는 이이첨이란 인물에게 특별한 애정을 가지면서도 그에 대한 경계를 풀 수 없었다. 세자처럼 설움의 길을 오래 걸어왔다는 사실 또한 그 이유가 되었다.

 

 

정유년 9월 세자가 이끄는 열은 삼남으로 향하고 있었다.

고생하란 말은 내 하지 않으렵니다. 어쩌면 형보다 내가 더 먼 길을 또 걸음해야 할지 모르지 않소.

길에 오르기 전 한음은 이와 같은 농으로 나를 배웅했다.

임금은 한음을 조정에 남겼다. 그는 명에도 이름이 있는 문장가였고 앞서 청원을 성사시킨 바가 있기에, 필요하다면 임금은 그를 또 수로 사용하려 하였다. 외교라는 허울에 빙자해 또 다시 구걸을 할 생각이었다. 임금은 군왕됨이 가난한 자였다.

우리는 아래로 향하는 길목 곳곳에서도 구걸하는 자를 만났다. 오랜 시간 주린 듯한 그들은 목이 아닌 눈으로 제 처지를 알렸다. 짐이 가볍고 길이 바쁜 우리는 줄 것도 살필 시간도 없었기에 그들을 외면하며 계속 아래로 향했다. 우리는 곧장 호남에 닿으려 하였다.

임진년 함경에까지 올라섰던 적의 제2군 사령관 가토 기요마사가 이번에도 선봉장이 되어 반도에 닿았다. 가토의 목표는 호남이었다. 우리의 곡기를 끊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놈이 부대를 나누어 곳곳에 적을 심어 놓았을 테니 우리는 호남으로 곧게 향하지 못하고 부러 험한 길을 택하여 한참을 돌아서 가기로 했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세자는 길을 돌아 내려가며 자신이 또 다시 삼남에 당도하였다는 사실이 민초들에게 충분히 퍼져나가게 하였다. 또한 임진년과 같이 다시 근왕병을 모으고, 스스로 일어난 의병들을 규합하여 하나의 세로 유효하고자 하였다. 하여 우리가 충주의 큰 호()에 이르렀을 때 다음 길목으로 택한 곳은 조령이었다.

조령이 흔히 넘기 힘든 고개로 일컬어지는 것은 비단 그 높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고개가 넓게 드러누워 그 산세가 한참을 아래로 쭉 퍼져 있었기에 나는 그것이 누운 호랑이의 몸과도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그 몸속의 폐장을 굽이굽이 꺾어 오르는 일은 멀고 지난하였다. 우리의 열은 별다른 곳에 잠자리를 차리지 못하고 그곳에 그대로 누워 밤을 보내는 일이 많았다. 하여 우리의 밤은 보다 더 길었고 더 어두웠다. 그런 탓에 잠자리까지 높은 이유로 우리는 별들과 아주 가까웠고 그것들은 유난히 반짝여 손에 만져질 듯하였다. 때때로 꼬리별들도 나타나 우리가 덮은 모포 위를 훑고 내리는 날도 많았다.

나는 그 꼬리별들이, 이 드러누운 조령의 몸이 밤하늘에 손을 들어 긁어내린 자국과도 같아 보일 때가 있었다.

가토는 임진년 함경에 이르렀을 무렵 산에서 우리 호랑이를 무자비하게 사냥했다. 우리는 사냥당한 짐승이 뱉는 울음의 진앙을 바로 정유년의 오늘에 지나고 있던 것이다.

그 진앙에 우리가 발을 대어 고개를 울리고 지날 때, 다른 발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적들이었다. 우리보다 숫자가 조금 더 많았다. 그들의 상태를 살피니 이미 다친 자가 많은 듯했다. 아마 한 차례 다른 곳에서 전투를 벌인 듯했다. 그들 또한 이 험난한 산을 오르기를 택한 이유는 그들 본대에 북귀하기까지 조선군과 맞닥뜨리는 일을 없애고 싸움을 피하려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로 원치 않는 만남이었다. 그러나 피할 수 없었다. 하여 순식간에 전투가 벌어졌다.

적들은 여러 방향으로 산개하여 올라왔다. 우리도 맞부딪치고자 열을 나누어 곧장 내려갔다. 높고 야윈 나무들을 사이에 두고 적과 우리가 맞닿았다. 맞닿은 거리가 너무 가까워 미처 칼을 먼저 꺼내지 못한 이들은 서로 몸을 던지고 받으며 싸움을 이어갔다. 나는 세자를 살피고자 그에게 눈을 돌렸으나, 그는 이미 칼을 빼들어 아래로 향하려 하였다.

저하를 보호하라! 모두, 저하를 보호하라!

이이첨은 그리 말하며 도포의 앞자락을 젖혀 칼을 빼들었다. 그리고 세자의 칼이 있는 곳과는 다른 쪽으로 제 몸을 던지듯이 달려갔다. 나 또한 내 주변의 병졸을 이끌어 적들과 충돌하기 위해 나아갔다. 전투가 격하게 치러지며 우리와 적들의 피가 튀어 조령 호랑이의 마르고 야윈 털을 붉게 적셔가고 있었다.

그때 이이첨 쪽에서 이런 말이 들려오자 날들의 부딪힘이 잠시 사그라졌다.

모두 칼을 놓아라! 역관은 저들에게 말을 옮겨라! 너희의 장수를 내가 잡았다!

이이첨이 적의 수장을 잡아 그 목에 칼을 대고 있었다. 승기를 잡았다는 생각에 나는 우리의 우두머리가 있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그러나 세자의 목에도 이미 칼이 들어 그의 눈에 날선 것의 빛이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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